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나채훈 삼국지리더십연구소장

「정관정요」에 나오는 당태종 이세민의 어록 가운데 ‘충신과 역적’이라는 단어가 꽤 많이 등장한다. 직전 왕조인 수나라 양제가 희대의 폭군(?)으로 낙인찍힌 만큼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으리라.

수나라 양씨 왕조를 엎어 버린 이세민이 제위에 올라 어제의 혁명 동지들 외에 과거 수양제에게 굽실거리던 조정 대신의 상당수를 요직에 기용했다. 당연히 혁명 주체 세력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리가 목숨 걸고 싸울 때 저들은 폭군에게 아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린 역적들입니다. 어찌하여 충신과 역적을 같이 대우하는 것입니까?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태도는 앙앙불락, 노골적인 혐오의 시선으로 조회에 참석한 옛 인물들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이세민이 허허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대들 창업 공신의 노고는 익히 아는 바다. 그리고 전조(前朝)에서 일했던 노대신들은 그리 책망할 일이 아니다. 저들은 수양제가 아부를 좋아하고 기개 있는 사람을 싫어했기에 그리 했을 뿐이다. 짐은 충성과 의리를 좋아하므로 모두들 그대들처럼 충성을 바치고 의리를 숭상하는 훌륭한 동지들로 바뀔 것임에 틀림없다. 두고 보아라."

분노를 일으키고 혐오 대상을 찾아 적극적으로 응징하려는 이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갈라치기도 마찬가지다. 이득을 노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원래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은 분할해 통치하는 의미다. 분할 지배라고 한다. 지배층이 피지배층의 민족·종교·경제적 이해 등을 이용해 내부 분열을 일으켜 지배를 쉽게 하려는 계책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지배에서 널리 쓰였다. 아랍에 수니파와 시아파의 끝없는 다툼, 대학살이 벌어진 르완다에서의 종족 전쟁, 가까이에는 일제강점기 때 3·1운동을 계기로 무단정치의 한계를 절감한 일제가 실시한 문화통치가 좋은 예다. 가혹한 식민 지배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만들어 우리 민족 내부를 이간시키고 분열의 효과를 노린 수법 말이다.

20대 대선에서 디바이드 앤 풀을 활용한 갈라치기 수법이 기승을 부렸다. 국민의힘 대표가 선두에 서서 취업 등에서 힘들어하는 2030세대의 남녀 갈라치기 공약과 발언을 쏟아냈던 것이다. 20대 남성 지지율이 떨어지자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달랑 내놓고 노린 것 역시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물론 이런 수법이 과거에 없었던 건 아니다. ‘지역감정’이라고 점잖게 명명된 실상은 호남차별주의를 오랫동안 활용해 왔다. 그나마 이 갈라치기 수법은 겉으로 강하게 손사래를 치는 매너 정도는 보였었다. 이번에는 그 가면마저 벗어 던지고 국민의 일부를 표적 삼아 공격하고 분노와 혐오를 수단으로 삼아 표를 결집하려 했다. 거대 당의 대표가 노골적으로 획책한 경우는 아마 없을 것 같다.

정치인의 소명의식, 실존적 고뇌 따위가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공리공론에 지나지 않단 말인가. 모든 것이 게임이고, 게임에서는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기면 선이고 패하면 악인가. 우리 정치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의 통합을 뭉개 버리고 태블릿PC에 그려진 도표, 지지율 등락 곡선에 따라 정치적 흥행을 간악하게 일삼아 남녀 갈라치기와 세대 포위론을 외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명하다.

투표 결과 그런 갈라치기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여부는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도 근소한 표차를 이유로 예상 외 선전했다는 투의 자위를 하지 말라. 촛불혁명을 계승한 정부라고 자위했고, 지난 총선에서 180석이라는 압도적 의석을 안겨 줬으나 결과는 정말 별로 아닌가 말이다. 제3지대 역시 패했다. 최악의 3%에 훨씬 못 미치는 득표는 뭘 뜻하는가?

정리하자면 이번 선거의 승리는 기득권 엘리트들의 것이 됐다. 반꺼풀 열린 눈동자는 더불어민주당의 오만과 헛손질, 국민의힘의 독선과 갈라치기 수법, 정의당의 한계와 진부함을 골고루 맛봤다. 승리자는 있으나 우쭐대거나 자랑스러워 할 입장이 아니라는 데 한국 정치의 또 다른 비애를 맛본다. 정치권은 이세민의 ‘충신과 역적’에 대한 설명을 재삼 곱씹어 보기 바란다. 그리고 자정 노력을 통해 퇴출시킬 건 퇴출시키고 ‘다모클레스의 칼’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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