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휴전회담과 후속 국가정전위원회 회의가 열린 판문점의 자매 마을에 해당돼 이름이 알려진 2개 마을이 있다.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 안에 있는 민간인 마을,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남쪽인 대한민국의 대성동(臺城洞) ‘자유의 마을’과 북한의 기정동(機井洞) ‘평화의 마을’이 그곳이다. 

대성동은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에 위치하며, 명확히 확정된 행정구역의 이름이 아닌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리는 영농지역을 일컫는다. 

이 지역은 판문점과 함께 군사구역이라 자세한 지리와 내부 사정은 기밀에 해당되며, 외부인의 접근이 차단됐기에 그 과정에서 생겨난 특성 자체가 곧 ‘지역의 이름난 사물’임에 틀림없다.

DMZ ‘대성동 마을’
DMZ ‘대성동 마을’

# 대성동 마을(自由의 마을)의 지리적 특성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마을인 대성동 마을은 정전 협정에 따라 1953년 8월 3일 군사정전위원회가 평화의 마을과 함께 조성했다.

올해 기준 46가구 183명이 거주하는 자유의 마을은 유엔사의 민사규정과 대한민국 법률이 공동 적용되는 특수 지역으로, 행정구역은 파주시에 속하나 민사 행정과 구제 사업은 유엔군사령부의 관리를 받는다. 

마을 주민은 국방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를 면제 받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다. 군사분계선 북쪽에는 기정동(機井洞) 평화의 마을이 위치했는데, 이 마을 또한 북한에서 유일하게 비무장지대에 위치한 민간인 거주지다. 자유의 마을과 기정동 마을은 한반도의 분단과 대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곳으로, 1951년 10월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회담에서 두 마을은 ‘비전투지역’으로 지정됐다.

마을 서북쪽으로는 개성공단이 보인다. 마을에서 개성공단까지는 직선거리로 4㎞, 걸어가더라도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DMZ 내에 있는 대한민국의 유일한 민간인 마을, 대성동에서 바라보면 북한 기정동 마을이 보인다. 

남한의 대성동과 북한의 기정동은 분단이 낳은 쌍둥이 마을로, 대성동은 물론 기정동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을 안내 표지판.
마을 안내 표지판.

# 대성동 마을의 지명 유래 

대성동 마을은 임진강 지류인 사천면 평야지대에 있는 조산리에 속했다. 조산리는 조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조산, 조산동이라고 했는데, 조산은 개성동 동면 백동리 마을의 하천 모래가 쌓여 산을 만들었다는 의미다. 

이야기에 따르면 고려말 대호우로 개울 모래가 내려와 부락 앞 개울변 높은 산이 성 같이 둘러싸였다고 해 대성동이라 하고 그 하천의 이름을 대성천이라 했는데, 조선시대에 사천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조산리 서쪽의 대덕산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마을 서쪽에 위치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데, 이 물이 개성에서 내려오는 사천과 합류해 임진강으로 흘러간다. 

한국전쟁 이전 이곳에는 전통적인 자연마을이 곳곳에 산재했다. 가장 큰 마을로는 ‘조산동’이 있으며 광매(송산리 또는 광명리)에 ‘광명공립국민학교’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어룡리, 남천말, 김천말, 냉정리, 방축동 등 작은 마을도 있었다고 한다.  

# 한국전쟁 중에도 농사 짓고 결혼도 한 주민들

대성동 주민들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인민군들이 대성동 옆으로 난 국도를 따라 급히 남하하면서 피난은 무의미했다고 한다. 심지어 먹고살려고 농사도 짓고 결혼도 했다.

피난은 이듬해인 1951년 1·4후퇴 때 일시적이고 개인적으로 이뤄졌다고 주민들은 이야기한다. 그들이 전쟁을 경험한 시기는 정전협정이 진행됐던 기간으로 38선 부근에서 진퇴를 거듭했을 무렵이다. 

이 시절 주민들은 비행기 공습과 방공호 생활을 뚜렷이 기억한다. 정전협정이 진행될 당시 대성동 마을이 중립지대에 포함되면서 전투가 벌어지지 않은 대신 주민들은 남북 간 정보전쟁의 한가운데 놓였다.

당시 대성동 마을에는 미국 정보부대인 켈로부대가 18개 초소를 운영했고, 마을에 주둔해 주민들을 정보원 또는 보초 근무자로 세웠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으로 전선을 넘나들며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군사분계선이 그어지면서 개성과의 왕래가 비로소 중단되고 파주 문산, 금촌 출입도 제한돼 고립됐다. 주민들을 위해 마을을 관할하는 미군이 트럭을 내주어 일주일에 고작 한 차례 문산을 왕복했는데, 주민들은 당일 볼일을 보고 귀가하지 못하고 일주일간 여관이나 친척집에서 묵으면서 술을 마시며 기다렸다가 마을로 돌아오곤 했단다. 대성동 남자들이 술을 잘 마시게 된 건 이때부터라는 주장도 있다.

주민들의 모든 행위는 유엔사의 통제를 받는데, 1969년이 돼서야 주민등록증이 발급돼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됐지만 유엔사의 역할이 한국군에게 이양됐을 뿐 마을 주민에 대한 최종 권한과 책임은 유엔사에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6년 전인 2004년 대성동 경비가 한국군으로 이양됐지만 마을을 출입하려면 대한민국 장관도 유엔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현실이다.

범죄가 발생하면 군인들이 현장에 출동해 현장을 보존하고 경찰이 출동해 조사하며, 선거투표 또한 DMZ 밖 통일촌에 별도로 마련된 투표소에 가서 해야 한다.

휴전 이후 14년간 참정권이 제한된 채 살아왔다가 1967년이 돼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이후 대성동 주민들은 투표일에 모두 함께 마을 밖으로 외출한다. 그래서인지 대성동 마을 사람들의 투표율은 매번 100%에 이른다.

# 거주민의 자격과 혜택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 면제와 동시에 권리도 제약된다."

대성동 마을 주민은 주거와 거주·이전의 자유가 제한된다. 정전 협정 당시 거주했던 원주민들과 그 자손들만이 거주 가능하며, 여기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1년 중 8개월 이상을 대성동에서 거주하지 않으면 주민권을 박탈 당한다. 즉, 남성이 외지인 여성과 결혼한다면 주민으로 남기도 하지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한다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다만, 여성이 외지인 남성과 결혼하더라도 주민권 유지가 가능한 예외적인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외지인 남성이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형식이다. 데릴사위로 입주하게 되면 그때부터 현지인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성동 마을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외지 출신의 남성은 휴전 협정 이후로 2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편, 본인 스스로 대성동을 떠난 사람이 대성동 주민으로 복귀하려고 하는 경우 유엔군사령관의 허가를 받아야 복귀할 권리를 얻게 된다.

대성동 마을 주민은 병역의 의무와 납세의 의무가 모두 면제된다. 즉, 군대 안 가고 세금도 안 낸다. 마을을 국제연합군사령부에서 관할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은 국제연합군(UN) 총사령관이 책임진다. 현재 한미연합군사령관이 겸직하는 UN 사령관이 관할한다.

앞서 기술했듯이 대성동 주민들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혜택을 줄 만하다고 여겨 대다수 국민은 이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평시에도 전시 통제를 받는 마을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통행금지가 있고, 오가는 데 수속이 필요하고, 친·인척이 방문하는데도 통행증을 신청해야 하고, 통행증 없으면 아예 못 들어간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부럽다고 하지만 의무가 면제되는 만큼 권리도 제약되기에 부러워해야 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많은 것들이 이곳 ‘내륙의 섬’ 대성동에는 없다. 마치 살면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말이다.

DMZ ‘대성동 마을’
DMZ ‘대성동 마을’

# 대성동 마을의 비전

대성동은 명확한 구분선으로 획정된 행정구역의 이름이 아니다. 현재 총 46가구의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 가는 영농지역을 말한다.

이 자그마한 한반도 비무장지대 내 민간인 마을인 대성동 ‘자유의 마을’ 옆에 있는 ‘의주로’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서울과 평양을 잇는 길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이름과는 다르게 자유로와 통일로는 대성동에 못 미쳐서 끊겼지만, 그에 반해 분단 이전의 의주로는 남북을 잇는 길이었다.

한국전쟁 이전 1930년대 의주로를 따라 조성된 1번국도의 물류를 개선시켜 사업을 한 ‘박흥식의 연쇄점’과 같은 전례가 있다. 이 때문에 의주로 주변 물류와 도시계획 사업이 기대됨은 물론 기존 개성공단이 미리 보여 준 거대 상권이 활성화되길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비무장지대가 무장된 현실과 유엔사의 비무장지대 통제가 군사적 목적에 국한됐다는 해석이 있는 만큼 내륙의 섬인 대성동의 잠재성에 대한 해석은 보다 다양하다.

"준비하는 미래는 두렵지 않다." 이제는 앞으로 다가올 통일을 위해 ‘대성동 마을’의 문화적 가치에 눈을 돌릴 때다. 

 파주=이준영 기자 skypro12@kihoilbo.co.kr

사진=<파주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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