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단상

청명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내린 가을비 덕택에 목마름도 다소 해갈된 듯 합니다.

배낭 하나 둘러메고 강화도를 찾았습니다.

인삼 및 화문석이 유명한 곳, 문화 역사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만 알았던 강화도에 대한 저의 무지함이 여과 없이 드러났습니다.

때마침 열린 한국유네스코 전국대회에 참석하며 강화도 전체가 살아있는 세계 문화유산임을 알았습니다.

지정학적 특성상 세계 각 국의 침입을 한 몸에 받았던 곳, 기원전 13세기 이전부터 왕조가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고인돌, 어머니의 삶과 애환이 녹아있는 화문석을 알게 됐습니다.

강화도는 참 이상한 곳 입니다.

전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이 이곳에 있고 칼과 활 등의 병기를 만들 수 있는 광물질도 풍부한 곳입니다.

그래서 강화도는 역사의 소용돌이마다 등장하며 왕실의 흥망성쇠가 곧 강화의 역사라 말 하는가 봅니다.

한 무리의 중학생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마도 학교에서 단체로 소풍을 온 모양입니다.

신미양요의 중심지인 광성보를 둘러보며 참 많이도 웃고 떠들며 즐거워하더군요.

그 아이들이 고려조 몽고 침입을 피해 전후 39년간 강화가 사실상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을 알까요?

그 옛날 제가 소풍왔을 땐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먹을거리, 볼거리, 들을거리 등이 풍성함을 넘어 그 자체로 살아 움직이는 강화도. 섬 특성상 해산물은 물론 농경지에 재배되는 강화섬쌀을 비롯해 속노랑고구마, 순무, 인삼 등 특산물이 풍부한 곳. 잦은 외세 침입으로 인한 역사의 요충지, 마니산을 비롯한 전등사·보문사 등 관광자원이 곳곳에 널려있는 곳이 강화도다.

다소 짧은 일정이지만 1박2일 코스로 강화도를 찾았다. 역사 유적지 탐방을 비롯해 마니산 등반, 사찰 순례, 맛 집 발굴 등으로 여행 일지를 잡았다.  〈편집자 주〉


마니산 등반



북으로 백두산과 남으로 한라산의 중앙에 위치한 마니산(해발 468m)은 백두산·묘향산 등과 함께 단군 왕검의 전설이 얽힌 명산이다.

산 정상엔 단군이 우리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던 제단인 참성단(사적 제136호)이 있어 현재도 해마다 개천절이면 이곳에서 단군의 제사를 지내고 전국체육대회 때마다 대회장에서 타오르는 성화도 이곳에서 7선녀에 의해 채화돼 경기장까지 봉송된다.

화강암으로 된 높이 6m의 사각 제단인 참성단의 기초는 하늘을 상징해 둥글게 쌓았고 단을 땅을 상징하며 네모로 쌓아 신성함을 강조했다.

참성단을 목표로 산행 코스를 잡았다.

강화인 입문인 초지대교를 지나 차로 20분가량 들어가면 마니산 등산로 입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마니산에 도착한 건 오후 2시. 산을 오르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참성단까지의 왕복 산행이 2시간 정도면 충분하다는 말을 듣고 사진기 하나 달랑 둘러메고 첫 걸음을 뗐다.

마니산의 가을은 ‘마니단풍’이라 할 만큼 산세가 아름답고 풍치가 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비교적 지형도 평탄하고 등산로도 잘 닦여 있어 노인 및 어린이도 쉽게 오를 수 있다.

아직 가을의 정취를 충분히 느끼기엔 단풍이 미흡한 면도 있었지만 곳곳의 푸른 녹음을 온몸에 받고 오르는 산행은 도심의 숨가쁜 생활을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충분했다.

초입에 들어서니 참성단까지의 등산로가 단군로와 계단로로 나뉜다는 표지판이 들어왔다.

다소 산행이 편하다는 계단로를 택했다.

산행 중간 ‘나무꾼과 신선의 만남’이란 재미난 설화도 듣고 아치형 단풍나무 숲을 지나니 계단로의 시작점을 알리는 휴식공간이 나왔다.

이곳까지 약 30분, 비교적 평탄한 길을 쉬엄쉬엄 올라와 크게 힘든 줄도 몰랐다.

물론 이후 닥칠 계단의 공포도 전혀 눈치 채지 못 했다.

하나 둘 셋 넷...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계단을 세어가며 올랐다. 320계단을 오르니 작은 휴식처가 나왔고 미리 준비한 생수로 목을 축인 후 다시 출발.

그 이후엔 어찌 올랐는지 잘 모르겠다.

계단을 세는 것은 당연히 포기했고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과 평소 운동부족, 술·담배의 나쁜 영향을 몸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모든 산이 그렇듯 힘든 여정의 끝은 정상이고, 정상에 오른 자만이 희열감을 느낄 수 있나 보다.

참성대에 오르니 그간의 고생은 온 데 간 데 없고 마냥 좋았다.

사방에 펼쳐진 바다를 보니 강화도가 분명 섬이란 것이 실감났다.

산 정상에 이미 100여 명의 등산객들이 있었다.

그중 여의도 성모병원 40명의 직원과 함께 단체로 산에 올랐다는 서광수(51)씨는 “그 동안 바빠 산에 한 번도 못 왔는데 이렇게 올라오니 가슴이 시원한 게 최고다”며 “마니산은 서울에서도 가깝고 또 주변 유적지 및 관광지가 많아 자주 찾는 곳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나무꾼과 신선의 만남(설화)



그 옛날 나무꾼 3명이 나무를 하려고 마니산 중턱에 왔는데 숲속에서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나무꾼 중 한 명이 이를 구경하며 노인들이 권하는 술도 같이 마셨다.

바둑을 보고 동네에 돌아오니 같이 갔던 나무꾼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인 30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노인들은 신선이었고 같이 마신 술은 불로주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란 말이 생겼다.(세종실록지리지)


등산객 인터뷰



“아무래도 봄 가을에 사람들이 가장 많죠. 요즘이 최고 성수기입니다.”

마니산 정상에서 만난 한용이(44·강화군 선두리)씨는 벌써 4년째 거의 매일 산을 오르고 있다.

등산객을 상대로 참성단 정상에서 아이스크림이며 칡즙, 홍삼즙 등을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5년 전 강화에서 국산차를 생산하는 식품공장을 운영했는데 그만 부도를 내고 말았어요.”

답답한 마음에 산을 찾았고 등산객을 상대로 음료수를 팔면 좋겠다란 생각으로 시작한 게 이젠 본업이 됐다고 한다.

“사실 제가 처음은 아닙니다. 이전에 이곳에서 음료수를 판매하던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장사도 잘 안 되고 산에 오르는 것도 힘에 벅차 포기하셨죠.”

사실 비라도 내리고 갑자기 바람이라도 불면 등산객 수가 줄어 그다지 수익을 기대하긴 힘들다는 게 한 씨의 설명이다.

날씨에 민감해 추운 겨울과 장마철엔 사실상 장사가 안 된다는 것이다.

한 씨는 그래도 일반인에게 마니산이 많이 알려지며 산을 찾는 사람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희망을 보였다.

“이 일로 빚도 많이 갚았고 앞으로 2~3년 더 한 후 재기해야죠.”

마니산에 올라 칡즙 한 잔 마시며 그가 말하는 인생대역전에 대해 듣는 것도 작은 재미다.


전등사



불교에서 전등이라 함은 부처님의 지혜 등불을 밝히고 법음을 전한다는 말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건립된 전등사는 혼탁한 세상을 헤쳐 나갈 부처님의 지혜 등불같은 사찰이다.

초지대교에서 10분 거리면 전등사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해 손쉽게 경내를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찾은 건 스님들의 공양이 막 시작되는 오후 5시30분께였다.

화강암으로 조성된 아치형의 동문을 지나 경내에 들어서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은행나무 보호수였다.

그 옛날 배불숭유정책으로 전국의 사찰이 박해를 받을 때 조정의 무리한 요구를 거부하는 뜻으로 이곳 은행나무의 은행을 영원히 열리지 않게 해달라고 주지스님이 기원했고 그 후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 쌍으로 마주보는 은행나무 보호수는 전혀 은행이 열리지 않고 있다.

은행나무를 뒤로 하고 전통찻집 ‘죽림다원’에 들러 대추차(3천500원)를 한 잔 마시고 대웅전을 향했다.

대조루(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을 지나 대웅전에 들어섰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는 대웅보전.

전등사가 너무 유명해서일까, 대규모 연회장같은 모습을 상상했었으나 그 고즈넉함에 감탄했다.

소박한 문양의 대웅보전 수미단(불상을 모시는 대좌)을 비롯해 목조산존불좌상, 그 배경에 있는 대웅보전 후불탱이 대웅전임을 알려줄 뿐 얼핏보면 일반 사찰의 지장전이나 약사전의 규모다.

대웅보전 추녀 밑엔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괴상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대웅보전 건립에 참여한 도편수를 배신한 여인의 벌거벗은 모습을 조각해 넣어 무거운 지붕을 영원히 떠받들게 했다고 전해진다.

경내에 있는 보물 제393호 범종은 일반 종과는 달리 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변에 16개의 연잎이 돌려져 있는 특이함을 보이고 있다.

이밖에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다는 선원보각지를 비롯해 단군의 세 아들이 지었다는 삼랑성 등 크고 작은 유적지가 즐비한 곳이다.

-시인 고은도 전등사 추녀 밑 괴상을 보고 ‘전등사’란 시를 지었다-

   
전등사

강화 전등사는 거기 잘 있사옵니다

옛날 도편수께서 딴 사내와 달아난

은수리 술집 애인을 새겨

냅다 대웅전 추년 끈에 새겨놓고

네 이년 세세생생

이렇게 벌 받으라고 한

그 저주가

어느덧 하이얀 사랑으로 바뀌어

흐드러진 갈대꽃 바람 가운데

까르르

까르르

서로 웃어대는 사랑으로 바뀌어

거기 잘 있사옵니다.


삼랑성



마니산에 참성단의 쌓은 시조 단군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정족산을 보호코자 성을 쌓기로 하고 세 왕자에게 이를 의논했다고 한다.

왕자들은 이를 흔쾌히 받들고 다음날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다.

시작하고 보니 산세도 험하고 공사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전국의 장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 쌓는 일을 도우니 난공사이던 산성이 불과 한 달 만에 완성됐다.

단군은 크게 기뻐하고 세 아들로 하여금 정족산의 봉우리를 각각 하나씩 안겨주며 성을 지키도록 했으니 이 것이 바로 삼랑성이다.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어 옛날의 모습은 찾기 힘드나 전등사 입구에 홍예문으로 남겨져 있는 남문이 복구돼 옛 면모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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