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양윤모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1949년 8월 12일자 「자유민보」에는 반민족행위자 이중화(李重華)가 공민권 정지 4년형 받은 기사가 실렸다. 이중화는 1918년 순사시험에 합격하고 바로 인천경찰서에서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에서 1920년대 초반, 이중화는 반민족행위자로서의 상당히 출중한 능력을 보인다. 이런 이중화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반민족행위 혐의로 체포된 것은 1949년 4월 12일이다.

구속기간이 연장되는 등 5차례의 피의자 신문이 이루어진 결과가 바로 공민권 정지 4년이었다. 이중화의 혐의는, 부녀자 강간 등을 제외하고라도 무려 7가지나 된다. 먼저 1930년 3·1 독립운동 11주년 기념일에 격문(민족에게 격함)사건으로 이수봉을 체포 고문 취조했고, 1932년에는 만보산사건과 관련, 박수복 외 7∼8명을 검속하고 고문을 가해서 박수복을 치사케 한 사실이다.

또 1929년에는 독서회 사건을 핑계 삼아 아무 관련이 없는 김수복을 체포·취조했으며,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독립운동자 권정곤 등을 체포 고문했다. 그리고 대동단사건과 관련 이재연을 체포하고 취조해 검찰에 송치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중화는 1919년 4월, 인천공립보통학교(1949년 당시 창영학교) 학생 김명진을 비롯해서 영웅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수십 명의 학생들을 검거했고, 심지어 이런 어린 학생들을 고문까지 했다는 것이다. 마치 1980년대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시위운동을 전개한 많은 대학생들을 잡아 가둬 고문하고 살해한 자들과 같이 말이다.

또한 이른바 1922∼3년 인천중대사건(군자금 획득사건)이 일어나자, 이중화는 이 독립운동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악랄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결국 인천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벌어진 윤응념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군자금 획득사건은, 이중화와 같은 조선인 반민족행위자에게 저지당하고 말았다.

이처럼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을 탄압한 공로로, 이중화는 1929년 인천경찰서의 형사부장이 됐다. 

그런데 1931년 7월 25일자 매일신보에는 중요한 기사가 하나 실려 있다.

‘인천서고등계원 비밀리에 대판(오사카)행-○○ 음모사건으로 도망한 연루자수색목적’이라는 기사인데, ‘인천경찰서에서는 고등계 이중화(李重華) 부장과 금궁(今宮) 형사를 비밀리에 대판(大阪)에 급히 파견시켰는데, 인천 ○○사건으로 도주 중인 연루자 1명이 대판에 잠복한 형적이 있어서 그를 체포하기 위한 것’이라는 기사이다.

 인천중대사건 관련자들 대부분은 이미 인천경찰서에 의해 체포된 바가 있다(전회 참조). 그리고 이 사건의 주요 참여자 김원흡 만이 일본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고 피신했다. 김원흡에 대해서는 1947년 3월 1일자 「대중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윤응념 씨 사건이 발각되자 선생은 오류동 모처에서 밤을 타서 경인철도를 도보로 다름질쳐 주안염전을 가로질러 만석동자택에서 다시 필목장사로 변장하고 군산으로 왔을 때 윤 씨 사건을 신문지를 통하여 알게 되었었다. 선생은 일이 이미 인천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목포에서 일주일 일본 대판(오사카)서 이틀 만에 다시 현해탄을 거쳐 부산에 그리고 그 길로 46일 만에 다시 두만강을 건너 간도성 연길로 갔다.’

물론 대중일보 기사는 1923년 상황이다. 그래서 매일신보 기사와는 시간적으로 꽤 차이가 난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할 듯 하다. 아무튼 이중화는, 김구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인으로서 ‘조선 민족의 독균’이며,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철저한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민권정지 4년이라는 미미한 처벌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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