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세종 때부터 초헌(초軒)이라는 게 있었다. 문관으로서 종2품(현재 차관보 정도) 이상인 관료만 탈 수 있었던 외바퀴 수레이다. 바퀴는 작으면서도 높이는 한 길이나 돼 탄 모양을 바라보면 사닥다리로 지탱하는 지붕에 오른 듯 위태로웠다.움직일 때는 다섯 사람이 붙어 잡아야 했고, 반드시 별도로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했다. 위험하고 불편했고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사를 살필 때 위에 올라탄 것을 자랑하지 말고 항상 주위의 수고하는 자를 생각하라는 뜻도 포함돼 있지 않았을까.이번 지방선거처럼 선거로 취임한 자
걸레스님 중광은 춤을 많이 췄다. 참으로 고독해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춤을 췄다. 그 무아지경에서 무엇을 잊고 싶었을까. 무엇을 감추고 싶었을까. 혼자나 둘이 있을 때는 그렇게 진지하다가도 여럿과 섞이면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더워지면 옷을 벗고 질탕한 춤사위에 놀아났다가 승방에 돌아오면 예외없이 극도로 차분해져 좌선을 하고 새벽까지 붓을 들어 달마를 그렸다.그의 춤은 속가의 남은 연(緣)을 떨어내는 것이었고, 흔들리는 자신에 대한 처절한 반항이었다. 무애의 자유를 찾는 수단이었다. 그래야 달마를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조금은 알려졌던 중앙 문학지에 작품을 내고 등단이라는 명예를 얻은 지도 30년이 지나간다.욕심처럼 시, 수필, 아포리즘, 단편소설, 동화, 동시 등을 마구잡이로 써 보고 시답잖은 책도 몇 권 냈지만 여전히 쓰기 어려운 것이 동화나 동시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계산적이고 물욕만 넘치는데, 맑고 순수한 어린이들의 심정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 같다. 과거 전파견문록이라는 어린이 프로를 자주 봤다. 어린이들의 재치에 감탄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린이가 설명을 하고 어른들이 그 설명에 맞는
길이는 두 자 정도에 폭은 한 자가 채 안 되는 작은 그림이다. 낮은 맞배지붕의 집은 텅 비어 있는 듯 허름하다. 집 좌측에 잣나무 두 그루가, 오른쪽에 잣나무 한 그루가 늙은 소나무 옆에 서 있는 쓸쓸하고 황량한 겨울 풍경이다. 그림의 좌측에 300여 자의 정갈한 글을 썼다.추사(김정희)가 제주도에 위리안치돼 기약없는 유배생활을 할 때인 59세(1844년)에 그린 국보 180호인 세한도이다.자신의 처지를 한탄함도, 왕을 원망함도, 홀로 된 고독의 문구도 없다. 덩그런 집 한 채와 네 그루 나무로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추사는
코로나로 지치고 또 지치는 이 겨울엔 평안북도 정주쯤에 있을 여우난골에 한 번 가자. 거기 가서 이미 110살이 넘은데다 엊그제 제삿날이 지난 백석(白夔行)을 오라 하자. 가다가 가즈랑집에 들러 아들 없는 할머니에게 어느메 산골에 곰이 아이를 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여우난골에 가서 온 식구들과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놀아 보자. 백석은 제 여우난족과 어울리고 우리는 기억도 가물한 할머니, 할아버지, 그 아래 졸망졸망한 식솔들과 한바탕 얘기꽃을 피워 보자. 개에게 쫓기다 고무신을 잃어버려 징징 울던 어려서 죽은 친구도 불러 놀아
지방공무원의 꽃이라면 5급 사무관이다.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역할이 바뀌기도 하지만 나이나 경력 등 가장 원숙한 직급이다. 전에는 사무관이 되기 위해 모진(?) 시험을 치러야 했다. 1차 시험은 객관식이었지만 2차 시험은 주관식이라 글씨도 잘 써야 했고 한자도 잘 섞어야 했다. 거의 40대 후반인 6급들이 사무관 시험에 몰두했다. 지금은 모두 심사승진으로 5급을 달아 일단 9급에 합격하기만 하면 다음 시험은 없는 셈이다.조선시대 선배 공무원들은 어떠했을까? 조선의 과거시험은 소과·문과·무과·잡과가 있었는데 과거의 꽃은 문과였다. 3년
충신(忠臣)이란 의롭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말한다.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하지 못할 때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하고, 자신의 안위보다는 나라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신하이다. 그들의 직간은 때로 덕이 있는 주군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간신들의 참언에 칼이 돼 날아오기도 했으니 그들의 운명은 순전히 주군의 어리석고 아닌가에 따라 달라졌던 것이다.중국의 도가서(道家書)인 「포박자(抱朴子)」에는 "도끼로 맞더라도 바른 길로 간하며, 솥에 넣어서 죽이려 하더라도 옳은 말을 다하면 이것을 충신이라 이른다"고 했으며, 당 태종시대의 정관의치(貞
제주도로 귀향 간 추사는 귀한 책을 구해다 주는 제자에게 답례로 세한도를 그려 줬다.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였다. 흔히 말하는 세한삼우(歲寒三友)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를 말한다. 지조와 절개를 의미해 시나 그림의 소재로 많이 쓰이고 선비나 군자의 영원한 벗이었다. 추위 속에도 꿋꿋한 아취를 잃지 않는 대나무와 매화를 세한이아(歲寒二雅)라 하고 매화와 국화를 세한이우(歲寒二友)라 한다. 세한우가 겨울철에 빛나는 식물로 시련을 참고 견디는 상징이라면 문인묵객의 영원한 화두가 된 사군자(四君子)는 계절의 순서를 따라 붙였다.
아들이 직장관계로 서울에서 잠시 전세를 살다 다시 집으로 오게 됐다. 인터넷으로 전출신고를 했는데, 가구주 확인이 필요하다며 ‘주민센터’에 가서 전입신고를 해 달라는 것이다. 예전 같지 않고 요즈음은 왜 이리 ‘주민센터’가 붐비는지, 전입신고 하러 왔다고 하니 번호표를 뽑아 기다리고 본인 확인은 물론 신고서에 꼼꼼히 기재하고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아들의 심부름을 하고 나니 기분이 매우 흡족했다. 나도 아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집에서 인터넷으로 하고 싶었지만 굳이 가서 하기로 한 것은 예전 아버지가 내 심부름을 할 때의 그 심정
한국전쟁 이후 인천 시내 여러 곳에 외국군 부대가 주둔했다. 부평 신촌에 ‘애스컴’이라고 불린 큰 규모의 미군부대가 있었고, 내가 살던 숭의동로터리 인근에도 영국군 부대가 있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자가 본국에서 보급됐다. 그들이 식사 후에 생긴 음식 쓰레기를, 부대에 취업한 한국 근로자들이 유출해 동네에 팔았던 음식이 ‘꿀꿀이죽’이다. 돼지의 사료용으로도 이용돼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여겨진다. 당시 서민들의 먹을거리라고는 미국에서 보내주는 구호물자인 480양식(쌀)과 우유가루, 시중의 강냉이죽, 밀가루 정도였다. 먹고 사는
코로나로 인해 1년 하고도 반이 지나도록 본의 아니게 위리안치의 형국인 국민들이 한둘이 아니다. 확진으로 인한 격리생활은 말로만 들었던 옛날의 위리안치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에 죄인에게 내리는 형은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의 5단계가 있었다. 태형은 작은 회초리 정도였고 장형은 173㎝에 폭 16㎝나 되는 버드나무로 된 치도곤을 비롯해 길이와 넓이에 따라 네 단계로 구분했다. 곤장 100대를 맞으면 거의 살아남을 수 없었다고 한다. 도형은 3년 이하 기간 일정 장소에서 노역에 동원되는 벌이었고 장형이 병과됐다.유형은 차
아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거실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리모컨을 옆에 두고 두 손으로는 말린 빨래들을 연신 개면서 말이다. 가끔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믹스커피를 타서 그 옆에 갖다 놓으면 아내의 손길은 더욱 바빠진다. 이런 시간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될까 말까 하다. 외손녀 돌보랴, 성치 않은 친정어머니 모시고 병원 다니랴 바쁜 아내는 일주일간 빨랫감을 쌓아 뒀다가 한꺼번에 세탁한다. 그리고 말린 다음 잘 접어 개어서 양말은 양말대로 팬티는 팬티대로 옷가지들을 분류해 놓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옆에서 지
최근 오정희의 단편소설 ‘중국인 거리’를 재미있게 읽었다. 한국전쟁 직후 인천 북성동 중국인 거리(차이나타운)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 이곳으로 이사와 겪은 체험과 성장 과정을 그렸는데 소설 속에 나오는 장소가 하나도 낯설지 않고 정겹게 다가왔다. 특히 소설 속 주인공이 살던 곳은 청일조계지 계단 옆으로 "그 앞의 목조건물 2층에는 양갈보 매기 언니가 세 들어 살고 주말이면 양공주를 찾아 나온 미군들로 소란스러웠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디인지 금방 짐작이 갔다. 1981년도에 ‘북성동사무소’에 근무해 당시의 모습을
근대 행정이 급변한 시기는 1980년대일 것이다. 미미했던 행정 환경이 그 시기부터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에 입문한 직원들은 거의 떠났거나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고위직에 있다. 아마 아련히 그 시절을 회상할 것이다. 필자는 1980년에 공무원에 입사했다. 처음 발령받는 곳이 동사무소였다. 사무실 가운데는 커다란 조개탄난로나 톱밥난로가 있고 매일 돌아가며 숙직을 했다. 문서나 민원서류 발급은 물론 수기여서 직접 써서 발급했다. 주민등록 등초본, 인감증명 등은 먹지를 용지 사이에 끼우고 눌러 썼다. 이름은 한자로 써야
퇴직하고 나니 직장에 다녔을 때가 불현듯 생각날 때가 많다. 특히 첫 직장에 대한 추억은 첫사랑만큼이나 껌 딱지처럼 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운 좋게 고3 때 첫 직장을 잡았다. 만 18세를 갓 넘긴 나이에 우연찮게 시청 앞을 지나다 5급 을류(9급) 공무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시험 본 지 두 달 만에 ‘중구 율목동사무소’로 발령을 받았다. 50여 년이 지난 세월 앞에 갑자기 그 동네를 가보고 싶어졌다. 첫 직장에서 처음 맡은 업무는 청소비담당 업무였다. 가가호호 방문해 청소비를 부과하고 받아내는 일이다. 초짜한테 동네를 하루
누구나 인생의 선배가 있듯 조직이라고 하여 선배가 없을 리 없다. 우수한 조직의 전통은 훌륭한 선배들이 있고 후배들이 따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필자가 33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민간인이 된 지 10년이 가까워오니 반공반민(半公半民)은 아닐지라도 점점 시민에게 가까워진다. 아직 공무원의 때를 벗지 못한 것은 공무원 조직을 옹호함이며 시민이 되어 감은 자신감 없이 소극적인 후배들을 책망하고 싶음이다. 현역 시절을 되돌아볼 때 존경받는 선배 역할은 거의 못했던 것 같다. 뜬구름 같은 업무를 채근하는 깐깐하고 차가운 선배가 아니었을까. 지금
며칠 전 지역신문에 ‘월남촌’을 개발한다는 기사를 봤다. 월남촌이라는 글자가 반갑게 다가왔다. 처음 듣는 사람은 아마도 베트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나 중구 도원동에 있는 마을 이름이다. 1960년대 후반 월남에서 한진 회사가 하역 운송사업을 할 때 그곳에서 일했던 기술자들이 돈을 벌어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50여 가구로 당시 인천에서 최초의 양옥집이었다고 한다. 율목동에 이어 1972년에 도원동사무소로 발령 받았다. 당시 도원동은 중구의 변두리로 거의 초가집이거나 슬레이트지붕의 판자집이 대부분이었으나 월
향원(鄕原)을 사전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기 위해 여론에 영합하는 사람이라고 돼 있다. 지탄을 받아야 하지만 발견하기가 어렵다. 장자의 양왕(讓王)편에는 "대체로 세상 평판을 바라 행동하고, 친한 자를 모아 붕당을 만들며, 학문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힘쓰고, 남을 가르쳐 자신에게 이익을 꾀하며, 인의의 간판을 내세우며 나쁜 짓을 행하고, 자기가 타고 다니는 가마를 꾸미는 일 등은 나는 차마 하지 못한다"라고 했고, 논어의 양화(陽貨) 편에는 "군자는 사람의 악한 것을 드러내는 자를 미워하며, 하류에 거하여 윗사람을 비방하는
거문고와 책, 시와 술은 선비나 처사, 은자나 야인들이 늘 가까이에 두고 즐기는 것들을 말한다. 속세를 멀리하고 명리에 초연한 이들에게 고아한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는, 말하자면 사색과 존재의 벗들이었던 셈이며 이 중에 특히 거문고와 시, 술을 ‘북창삼우(北窓三友)’라 한다. 장한가로 유명한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시에서 유래됐다. 북쪽에 창을 낸(속세를 벗어난 혹은 속세와 담을 친) 사람들의 벗이라니 얼마나 시적인가? ‘오늘 북창 아래에서 무엇 하느냐고 스스로 물어보네. 아! 세 친구를 얻었으니 세 친구는 누구인가. 거문고를 뜯다가
몇 해 전 퇴직 후 봉사를 해보고 싶다는 어쭙잖은 동기로 청렴강사가 되겠다고 청렴교육연수원의 강사양성 모집에 응모했었다. 국가청렴위원회에서 주관하는 2박 3일 기본계획을 받았다. 나름 시청 감사실에서 근무하면서 몇 번 후배들에게 청렴교육도 해본 터라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교육과목도 사례와 제도의 이해, 법규 설명, 행위기준 설명 등이 주여서 뿌리에 해당하는 기본적인 소양과목이 없었다. 시험문제도 왜 그리 비비 꼬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공직자가 왜 청렴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없이 그